명소/명당

호암이병철 생가

lkjea 2009. 11. 6. 18:59
  * 09. 11. 05. 경남 의령군 정곡면 소재지
  * 생가로 가는 소재지 입구
 * 대문을 드러서며
* 1851년 호암선생의 조부께서 손수 지은 전통한옥 안채
* 뒷산 : 후견인 으로 장엄하고 돌이없고 바람막이,갈라지지 않고,
  소쿠리모양으로 병풍치듯 둘러싸고, 산의 끈부분(배산임수)
* 앞이 좁고 뒤가(마당) 넓다.
* 서사택, 간좌
 * 안산 : 물이 나가는 곳. 독립되고 ,아름답게
 * 안채에서 90도 안에 드는 산

* 끝자락에 돌이 꽉 막아주어 돈이 뭉쳐진다. 만지고 가야 정기를
  받는다나?
 
* 백호도 싸 안았고
 * 길보다 대문이 대문보다 안채가 높아야한다(전저후고)
* 퍼옴 : 사랑과정열 그리움

湖巖 이병철 <1910 ~ 1987 >

호암 생가는

안채, 사랑채, 대문채,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,

안채는 다시 부엌과 부엌방, 방 2개, 대청으로,

사랑채는 방 2개와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.

대문채에는 솟을대문 양쪽으로 방 2개가 배치되어 있다.

배후 전경. 대문채

사랑채 내부. 사랑채

1851년 이병철 선생의 조부께서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었으며

호암선생은 유년 시절과 결혼하여 분가하기전까지이 집에서 살았다.

사 랑 채

안 채

풍수지리에 의하면,

이 집은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(露積峯)

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

혈(穴)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,

멀리 흐르는 남강이 물이 빨리 흘러들어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

천천히 흐르는 역수(逆水)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

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.

생가를 복원할 때 본채가 지어진 연대를 남기기 위해

대들보의 상량문을 옮겨 놓았다 한다.

< 辛亥年(1851년) 癸巳月辛卯日乙未時立柱上樑>

장 독 대

사 랑 채

바위의 모양이 마치 벼가마를 쌓아 놓은 것 같아 재물이 모이는
명당이 되기도 했단다.

바위가 마치 돈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 같이 보여

관광객들은 한 번식 안아보며

재물복이 쏟아지기를 기원<?> 한단다.

호암 선생 조부는 3형제였고좌우에 둘째, 세째 조부의 집도 있다.

별장으로 사용하는 집이란다.